[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발달장애 자녀 둘을 둔 필리핀 미등록 이주민 여성이 첫째 아이의 실종 소식을 듣고 경찰서를 찾았다가 강제 출국 위기에 놓였다. 미등록 이주민 A(48)는 4월 22일 경찰의 '자진 출석 서약서' 서명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에 구금됐다. A는 이주민 단체의 지원을 받아 익일 '보호 일시 해제'로 풀려났지만, 오는 6월 일가족과 함께 10여 년간 살던 한국 땅을 떠나야 한다.

A의 사연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세금 안 내는 외국인을 추방해야 한다", "불법체류자에게 자진 출석 기회를 줬는데도 협조하지 않아 출입국·외국인청에 구금한 것이 왜 잘못인지 모르겠다"는 부정적 반응이 터져 나왔다.

2020년 12월 기준 한국에 머무는 미등록 이주민은 39만 명에 이른다. 한국인이 기피하는 시설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보수를 받고 고된 일을 하지만, '미등록'됐다는 이유로 법적·행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며 살아간다. 이들을 바라보는 주변 시선 또한 차갑기만 하다.

혐오와 배제로 얼룩진 사회에서, 다행히 미등록 이주민에게 보편적인 인권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9년 '이주 인권 가이드라인'을 발간하고 "미등록 이주민들은 범죄 피해를 입거나 이를 목격해도 신분 노출을 우려해 신고를 꺼리게 된다"며 "권리 구제 절차가 진행 중인 미등록 이주민의 경우 '통보 의무 면제'가 아닌 '통보 금지'로 전환하는 방향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뉴스앤조이>는 4월 29일 대한성공회 용산나눔의집에서 A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 사회가 미등록 이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을 비롯해, 강제 출국을 앞둔 심정, 한국 사회에 바라는 점 등을 물었다.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했으며 통역을 위해 활동가가 동석했다. A는 기자의 사전 질문에 대한 답을 빼곡히 적어 왔다. 그러나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종이에는 시선을 두지 않고 한이 맺힌 듯 이야기를 쏟아 냈다. 아이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난 4월 22일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경찰서를 방문했다가 강제 출국 위기에 놓인 필리핀 출신 미등록 이주민 A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지난 4월 22일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경찰서를 방문했다가 강제 출국 위기에 놓인 필리핀 출신 미등록 이주민 A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살아남기에 집중했던 지난 10여 년

A는 2008년 2월 본국 필리핀을 떠나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그의 손에는 15일간 체류할 수 있는 관광 비자가 들려 있었다. 최종 종착지인 캐나다로 가기 전까지 남편과 함께 잠시 한국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남편은 3년 전 외국인 근로자로 일할 수 있는 E-9(비전문취업) 비자를 취득해 한국에 먼저 와 있었다. A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자신을 고용해 주겠다는 가정을 만나 체류 기간을 3개월 연장했다. 남편이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갔을 무렵, A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한국에 홀로 남아 고된 일을 하다 보니 계류유산(태아가 죽은 채로 자궁 안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나오는 일 - 기자 주)이 찾아왔다. 병원에서는 몸에 독이 퍼져 위독한 상황이라고 했다. A는 "생존하기 위해 고통과 싸우는 시간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달간 입원 치료를 받게 된 A는 비자 연장을 위한 서류 작업을 채 마치지 못했다. 입원 치료가 끝난 뒤 워킹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출입국·외국인청을 방문했지만, 합법적인 체류 기간이 넘었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비자를 발급 받아 한국으로 돌아온 남편과 헤어질 수 없었던 그는 그렇게 미등록 이주민, 아니 '불법체류자'가 됐다.

2011년 비자 만료를 앞두고 있던 남편은 친구를 통해 비자를 연장해 주겠다는 한국인 브로커를 소개받았다. 남편은 나이 제한이 있는 E-9 비자 대신 다른 비자로 체류하게 해 주겠다는 브로커를 신뢰했다. 브로커는 남편이 모은 전 재산 300만 원과 여권을 들고 달아났다. A와 남편 사이에는 2009년, 2010년에 태어난 두 아이가 있었다. 부부는 한순간에 아이들 분유·기저귀 값도 감당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당장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민은 주로 건설 현장과 식당, 한국인 가정 등에서 일한다. A는 "'아이들을 먹여 살릴 만큼의 수입인지', '정직한 일인지' 이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고 말했다. 남편은 음식점·술집에서 종일 일했고, A는 베이비시터, 청소 일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A는 아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쏟아 냈다. 차별과 배제로 얼룩진 한국 사회에서 '미등록 이주 여성'의 돌봄은 가능한 일이었을까. 뉴스앤조이 나수진
A는 아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쏟아 냈다. 차별과 배제로 얼룩진 한국 사회에서 '미등록 이주 여성'의 돌봄은 가능한 일이었을까. 뉴스앤조이 나수진

일 자체도 힘들었지만, 차별 때문에 더 지쳤다고 했다. A는 "외국인 사업주와 달리, 한국인 사업주들은 미등록 이주민에게 차별을 일삼았다. 남편은 한국인 직원들에 비해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 식사·휴식 시간을 쪼개서 일했다"고 말했다.

부부가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애를 쓸수록 아이들은 방치되어 갔다. '출생 등록'조차 하지 못한 아이들은 미등록 이주 아동 어린이집에 다녀야 했다. A는 그곳에서 아이들이 여러 차례 폭력도 겪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귀가한 아이들의 몸에서 종종 멍이나 혹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아이들 몸에 있는 흉터를 보고 경찰에 학대 신고를 하고 싶었지만, 신분이 들통날 것 같아서 속으로 삼킨 적도 있다. 미등록자(undocumented person)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으로 수십 번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들에게 자폐성 발달장애도 발견됐다. A는 "빈곤을 이겨 내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결국 아이들의 건강한 발달과 권리를 유린한 것 같다"라고 울먹였다.

아이 찾으러 경찰서 갔을 뿐인데…

첫째 아이(13) 실종 사건이 일어난 4월 22일, A는 병원에서 '척추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 학교 측의 신고를 접수한 경찰이 A에게 "아이가 사라졌다"고 전화로 알렸다. A는 겁이 났다고 말했다. '비자가 만료된 미등록 이주민'이고, 경찰서에 가게 되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도 아이가 실종돼 학교 선생님과 함께 경찰서에 방문한 적 있었고, '경찰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조건 없이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찰서로 향하기 전 A는 평소 교류하던 이주민 활동가에게 전화를 걸어 "혼자 경찰서에 가도 되겠냐"고 한 번 더 확인했다. 활동가는 "최근 이주민 지원 관례들로 볼 때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아이들이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

점심 무렵 경찰서에 도착한 A는 처음에는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자 문제가 거론됐고, A가 자신의 체류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자 경찰들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A의 지원 연락을 받고 도착한 활동가에게 "조사 관련 서류는 기밀"이라며 A와 동석하지 못하도록 격리했다.

인터뷰에 앞서 A에게 질문을 보냈다. A는 인터뷰 당일 글씨가 빼곡히 적힌 답변지 여러 장을 가져왔다. 무엇이 그가 이토록 많은 말을 하고 싶게 만들었을까. 뉴스앤조이 나수진
인터뷰에 앞서 A에게 질문을 보냈다. A는 인터뷰 당일 글씨가 빼곡히 적힌 답변지 여러 장을 가져왔다. 무엇이 그가 이토록 많은 말을 하고 싶게 만들었을까. 뉴스앤조이 나수진

A는 "(경찰이) 문서를 건네면서 서명하라고 했다. 문서에는 한국어와 영어가 섞여 있었다. 밖에 있는 활동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찰관들이 문을 잠갔다.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아 '문서에 대한 설명이 충분히 제공된다면 서명하겠다'고 경찰에게 말했다"고 했다. A가 받은 서류는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청) 자진 출석 서약서'였다.

"경찰관들은 '문서에 사인하면 아이와 함께 집에 돌아가는 대신 자진 신고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체포돼 외국인청으로 연행될 것'이라고 했다. 문서의 내용을 이해하고 서명할 수 있는 나의 권리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을 포기할 것인가를 두고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A는 경찰에게 자신이 발달장애를 가진 두 아이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거듭 설명했으나, 경찰은 서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고 말했다.

MBC·<경항신문>·<한국일보> 등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자신들은 출입국관리법상 해당 규정과 '내부 처리 지침'을 들어 적법하게 대응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A를 비롯해 미등록 이주민 지원 활동을 해 온 대한성공회 용산나눔의집 자캐오 사제는 민원인 자격으로 경찰서를 방문한 미등록 이주민을 적발하지 않는 관례가 최근 몇 년간 이어져 왔다고 설명했다. 자캐오 사제는 "등록이든 미등록이든 이주민이나 민원인이나 피해자인 경우 아주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신원 조회를 따로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경찰이 과잉 대응한 사례"라고 주장했다.

A는 출입국·외국인청으로 인계되기 전 발견된 첫째 아이와 만날 수 있었다. A는 "우리 아이의 꿈은 '경찰관'이다. 아이가 평소 경찰관은 사람을 돕고, 존중하고, 나쁜 사람들을 벌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 경찰관들이 엄마를 괴롭히는 장면을 봤다. 아이는 매우 혼란스러워 했다"고 말했다.

"정말 혼란스럽고, 슬프고, 화가 난다. 미등록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발달장애 아이를 두고 떠나가게 한 상황이 트라우마로 남았다. 내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중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저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경찰서에 방문한 것뿐이다. 내가 저지른 죄라고 한다면 어머니로서 최대한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을 부양한 것밖에 없다. 그게 내가 저지른 크나큰 범죄인 것 같다."

진보한 한국 사회 인권 의식,
미등록 이주민 인권은 그대로

현재 A는 '보호 일시 해제'를 받아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6월 22일까지만 한국에 머물 수 있다. A의 남편은 이번 일로 미등록 이주민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직장에서 해고됐다. 부부는 남은 기간 이주 비용을 마련해야 하고 필리핀 현지에서 발달장애 아이들이 다닐 학교도 알아봐야 한다. 부부는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올해 연말까지만이라도 한국에 머물 수 있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보호 일시 해제'를 연장한다고 해도 기간이 얼마나 늘어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국 사회는 미등록 이주민인 A와 가족들의 삶을 멈춰 세웠다. A는 자신의 처지가 성경에 나오는 '주인이 먹고 남긴 부스러기를 먹는 개'와 같았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한국 사회는 미등록 이주민인 A와 가족들의 삶을 멈춰 세웠다. A는 자신의 처지가 성경에 나오는 '주인이 먹고 남긴 부스러기를 먹는 개'와 같았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신앙인이기도 한 A는 성경 속 가나안 여인이 예수에게 한 말(마 15:27)을 인용하기도 했다.

"나는 한국에서 살면서 개가 된 기분이었다. 주인의 식탁 위에 있는 만찬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먹고 남긴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것을 바랐을 뿐이다. 그것이 그렇게 큰 욕심인가 싶다. 지금은 남긴 것들 마저 다시 도로 가져가는 상황이다. 내가 한국인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좋은 사마리아인이 되어 줄 수 없느냐는 것이다."

인터뷰에 함께 임한 자캐오 사제도 이주민 인권에 대한 한국 사회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주민은 한국 사회에 없으면 안 되는 존재다. 이주민도 세금을 내고, 무너지고 있는 농어촌 지역이나 중소 도시를 지탱하는 인구다. 더 나아가 이주민은 한국 사회의 다양성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존재다. 이들은 보충 요소가 아닌 필수 요소다."

A와 같은 사례가 다시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호문화주의에 기반한 인도주의적 지침이나 행정 재량권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캐오 사제는 "경찰 지침이나 행정 재량권 자체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이 시혜적 인도주의로 작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주민의 삶의 이야기를 배제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필수 요소로 인정하는 상호문화주의적인 관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캐오 사제는 A를 출입국사무소로 인계하는 데 있어 경찰이 국제 규범인 유엔 아동권리협약을 위배했다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유엔 아동권리협약 제9조는 '법률 및 절차에 따라서 사법 당국이 부모와의 분리가 아동에게 최선의 이익이 된다고 결정한 경우 외에는, 아동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부모와 떨어지지 않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장애 아동을 보호자와 분리해 구금한 사실은 유엔 아동권리협약상 '아동 최선의 이익'이라는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캐오 사제는 "법무부에는 유엔 아동권리협약 준수, 경찰청에는 소수자 인권이 보호되는 지침 개정을 요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A가 바라는 것은 한국 사회 내 미등록 이주민에 대한 관심과 인정이다.

"많은 한국인이 미얀마 시위 등 인권 보호를 위해 관심을 갖고 있다. 그만큼 국내 이주민의 사례에도 관심을 가져 주면 좋겠다. 나의 아이들은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존재하지 않는 이들로 취급받는다.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났고 자라서 한국인이나 다름없다. 이 아이들이 필리핀으로 가게 되면 도리어 외국인이 된다. 필리핀어도 모르고, 보고 들은 것이 모두 한국의 것이다. 자신들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한국 국적을 가진 아동이 아니기 때문에 떠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까지 원하지 않는 나라라면 떠나는 것이 맞지 않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나와 같이 아이를 가진 부모들, 특히 장애 아이의 부모들이 나의 상황을 살피고 우리 아이가 한국에서 자라는 것을 받아들여 준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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